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성 사건 (문단 편집) == 배경 == 1920년 산동성에서는 심각한 가뭄으로 기근이 퍼졌다. 여기에 전염병까지 덮치면서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였는데 [[안직전쟁]]으로 패권 다툼에 정신이 없던 중앙정부는 이를 구제할 능력이 없었고 지방군벌들은 재원 확보를 위해 각종 세금을 부과하여 민중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1920년 안직전쟁에서 [[안휘군벌]]이 패배한 이후 안휘군벌 장경요의 잔여 부대는 호남전선에서 패배한 이후 그대로 패잔병이 되었고 아예 토비가 되어 각 지방으로 흘러가게 들어갔는데 산동성에도 많은 토비들이 유입되어 치안이 극히 어지러웠다. 이들 토비들은 돈을 받고 용병일을 하였고 금전 지불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정부군과의 전투도 불사하였다. 또한 외국인들을 상대로 살인강도나 인질극을 벌이기도 했는데 1920년 6월 13일 악주에서 토비가 미국 선교사를 살해했고 1922년 8월 17일 롱해철도에서 토비들이 프랑스인 기관사 1명과 그리스인 기관사 1명을 납치했다. 다행히도 몸값이 지불되어 12월 20일 석방되었으나 1922년 12월 11일에는 미국 지화양행 지배인 찰스 골드먼이 현금 6만원을 수송하던 중 살해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정부는 열강 공사단에 사과하고 사태 해결을 위해 몸값을 지불했는데 이를 본 토비들은 외국인 납치에 더욱 열성이었다[* 현재 모든 국가들이 테러리스트의 인질사태를 '교섭은 없다'며 강경책으로 밀고 나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번 이런식의 유화적인 해결책을 쓰면 오히려 '호구'로 여기고 또다른 인질극을 벌여 더욱 놓은 몸값을 내놓는다.]. 한편 산동성에서는 1920년 장경요의 부하였던 손미주가 봉, 등, 비 3현의 교계지에 모여 산동건국자치군을 선포하고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동생 손미요와 주천송을 부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들 밑에는 5로군이 있었는데 1로군 사령관은 손미주가 겸했고 2로군 사령관이 곽기재(郭琪才), 3로군 사령관이 주천송(周天松), 4로군 사령관이 왕계상(王繼湘), 5로군 사령관이 유청원(劉淸源)이었다. 이들이 1922년 7월 지주와 부호들을 습격하여 21만원을 강탈하자 정부는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토벌했는데 7월 15일 손미주가 전사하자 24세의 손미요가 총사령관에 추임하여 1922년 8월 포독고에서 1500명의 토비를 거느려 정부군 6여단을 격파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에 북양정부는 산동독군 [[톈중위]]을 토비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산동군 5,6 혼성여단과 20여단, 5사단을 주어 포독고를 포위공격하게 하였다. 1923년 4월 손미요의 산동건국자치군은 포위되어 식량과 식수가 동이 나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